100년이 넘는 한국 선교, 5대째 이어지는 조건 없는 사랑, 한인들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로이스 린턴 선교사 96세로 소천

1996년 호암상을 수상하는 로이스 린턴 선교사

5대에 걸쳐 한국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으로 살아낸 린튼 선교사 가문의 로이스 엘리자베스 플라워스 린턴(Lois Elizabeth Flowers Linton) 선교사(96세)가 9월 7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로이스 린튼의 한국명은 인애자이다.

5대째 한국 선교에 매진하고 있는 린튼 가문의 증조할아버지 1대 유진 벨은 1895년 가난한 조선에 도착해 교육과 의료 사역에 매진하며 복음을 전했고, 2대 윌리엄 린튼은 1912년 미국 조지아 공대를 수석 졸업하고 21세에 미국 남장로교 최연소 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돼 교육선교에 헌신하다 현 한남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으로 섬겼다. 3대 휴 린튼 선교사와 베티 린튼 선교사는 순천 결핵 재활원을 운영하며 30년 이상 결핵퇴치사업에 기여한 공로로 1996년에 국민훈장을 받다.

로이스 선교사는 은퇴 후 애틀랜타에서 멀지 않은 노스캐롤라이나주 남장로교 은퇴 선교사들이 모여사는 블랙 마운틴 선교사 마을에서 여생을 보냈다. 

18일 기자회견에서 한병철 목사(담임 애틀랜타중앙교회)가 로이스 엘리자베스 플라워스 린턴(Lois Elizabeth Flowers Linton) 선교사와의 일화를 소개했다.

18일(월) 한병철 목사(담임 애틀랜타중앙장로교회)와 아가페미션(대표 제임스 송 선교사)는 “한인들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로이스 린튼 선교사”의 삶을 기리고자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병철 목사는 로이스 선교사를 “꽃보다 아름다운 선교사”라고 소개하며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의 삶을 사셨다.”고 회고했다.

한 목사는 로이스 선교사에게 “서울도 아닌 순천 외진 곳에서 외국인 선교사로 한인들을 평생 섬기고 살게 한 원동력이 뭐였냐?”고 질문했다고 했다. 로이스 선교사는 “예수를 믿으며 열심히 일하는 순수한 한국인들이 눈에 밟혀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고백했다고 한 목사는 말했다.

루이스 선교사는 원하던 소원대로 84년 교통사고로 사망한 순천집 뒷동산에 묻힌 남편의 묘지 옆에 묻힐 예정이다. 로이스 선교사의 추모예배는 10월 7일 오후 2시에 노스캐롤라이나주 바너즈빌에 위치한 딜링햄 장로교회에서 열린다

왼쪽부터) 김순영 장로(동남부장애인체육회 이사장), 이창훈 미션아가페 본부장, 한병철 애틀랜타중앙교회 담임목사, 제임스 송 미션아가페 회장, 이은자 선교사(미션아가페)

한병철 목사와 미션아가페 임원들은 평생에 거쳐 대한민국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한 로이스 선교사의 추모예배에 많은 한인들이 참석해 주길 권면했다.

인애자 선교사는 1927년 1월 7일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제퍼슨 플라워스 목사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1947년 어스킨 대학에서 저널리즘 학위를 받았고, 휴 매킨타이어 린튼 목사와 결혼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1953년 남편과 함께 남장로교 선교사로서 한국에서의 선교 사역을 시작한다.

그녀는 6명의 자녀를 키우며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농촌을 위해 결핵 치료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선교 사역에 매진했다. 그녀는 순천에서 약 2,000명의 외래 환자를 치료하는 프로그램을 직접 지휘했으며, 진료소와 함께 두 개의 결핵 요양소를 운영했다. 린튼 목사는 1984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베티는 1993년 은퇴할 때까지 순천에 남았다.

은퇴 후 노스캐롤라이나주 블랙마운틴으로 이사했지만 그녀의 한국 사랑은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그녀는 한국을 계속 방문하며 1995년, 자녀들과 함께 북한 주민을 섬기기 위한 자선 선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린튼 가족이 북한을 위해 시작한 기독교 사역은 한국과 미국 교회의 지원을 받아 계속되고 있다.

추모예배 장소: 딜링햄 장로교회 16 Stoney Fork Road, Barnardsville, North Carolina 28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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